‘잘함’에 갇힌 교육, ‘앎’을 잃어가다
현대 교육 시스템은 양적 평가에 기반한 '잘함'을 학습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경향이 짙다.
여기서 '잘함'이란 주로 시험 성적, 등수, 학위와 같은 외형적인 지표를 통해 측정되는 능력을 의미한다.
학생들은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좋은 학교와 안정된 직업을 얻기 위해 학습이라는 길고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다.
이러한 목표 설정은 학생들로 하여금 내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탐구하기보다는, 주어진 문제를 효율적으로 풀어내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 중심의 교육은 본질적인 '앎'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앎'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지식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다양한 맥락에 적용하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현재의 교육 환경에서는 시험 범위 내의 내용을 단기적으로 암기하여 높은 점수를 받는 학생이 '잘하는' 학생으로 분류되지만, 그 지식이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삶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부족한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잘함'이라는 목표 아래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학습 자체에 대한 흥미와 내재적 동기를 상실한다.
진정한 의미의 지적 성장과 자율적인 학습 능력은 등한시되며, 주입식 교육의 틀 속에서 수동적인 학습자로 전락하기 쉽다.
이러한 교육 시스템은 졸업 후에도 지식의 유효 기간이 짧아지고, 급변하는 사회에 필요한 유연한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을 함양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는 심각한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잘함'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앎'의 가치를 추구하는 교육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평가가 뇌와 학습에 미치는 영향
교육 현장에서의 과도한 평가 중심주의는 학습자의 뇌와 인지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진정한 '앎'으로의 길을 가로막는 여러 기전을 가지고 있다.
심리학 및 뇌 과학 연구는 외부적인 평가가 어떻게 학습자의 내재적 동기를 저해하고, 피상적인 학습만을 유도하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도파민 보상 시스템과 외적 동기의 함정
인간의 뇌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얻는 내재적인 만족감을 통해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여 학습을 강화한다.
그러나 외부적인 평가, 즉 시험 점수나 등수와 같은 외적 보상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학습 과정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보다는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학습을 인식하게 된다.
초기에는 외적 보상이 학습 동기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학습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소멸시켜, 외적 보상이 없을 경우 학습 활동 자체가 중단되거나 효율이 저하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내재적 동기가 사라지면 학습자는 새로운 정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멈추고, 단지 평가 기준에 부합하는 최소한의 노력만을 기울이게 된다
는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피상적인 지식 습득과 시험 불안
평가 중심 교육은 주로 단답형, 객관식 문제 풀이 능력을 요구하여, 이는 암기 위주의 피상적인 학습을 유도한다.
학생들은 복잡한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고 사고를 확장하기보다는, 시험에 나올 만한 핵심 내용을 단편적으로 외우는 데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학습 방식은 정보의 유기적인 연결을 방해하고, 새로운 상황에 지식을 적용하는 응용력을 저해한다.
또한, 높은 성적에 대한 압박감은 학생들에게 '시험 불안'을 야기한다.
과도한 불안은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을 저해하여 학습 효율을 떨어뜨리고, 실제 시험 상황에서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만든다.
심지어 불안감은 창의적 사고나 비판적 문제 해결 능력을 요구하는 고차원적인 인지 과정 자체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핀란드 교육 사례의 시사점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교육 시스템으로 손꼽히는 핀란드의 사례는 '평가보다 앎'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핀란드는 초등학교 단계에서는 학생들에게 별도의 시험을 치르지 않으며, 고등 교육에 진학하기 전까지도 표준화된 전국 단위의 시험이 거의 없다.
대신 학생 개개인의 학습 과정에 대한 교사의 지속적인 관찰과 피드백을 통해 학습 진도를 파악하고, 개별 맞춤형 교육을 제공한다.
이는 학생들이 성적 경쟁에서 벗어나 흥미를 기반으로 한 깊이 있는 학습을 추구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와 같은 국제 지표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는 비결이 되고 있다.
핀란드의 교육은 시험을 통한 '줄 세우기'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진정한 학업 성취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앎’을 지향하는 미래 교육의 방향
진정한 '앎'을 목표로 하는 교육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교육 방식의 변화를 넘어, 교육 철학과 사회적 인식의 근본적인 재정립을 요구한다.
'잘함'이라는 외형적인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앎'이라는 내면의 지적 성장을 지향하는 교육은 다음과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첫째, 평가의 목적을 '판단'에서 '성장 촉진'으로 전환해야 한다.
현재의 평가는 주로 학습의 최종 결과를 판단하고 등급을 매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학습 과정을 지원하고 촉진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과정 중심 평가, 형성 평가, 루브릭 기반 평가 등을 통해 학생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어떤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한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피드백을 제공함으로써 학습의 개선을 유도해야 한다.
평가 도구 또한 암기 위주의 주관식이나 서술형, 프로젝트 기반 과제 등으로 다양화하여 학생들의 심층적인 이해와 적용 능력을 측정해야 한다. 시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목적과 활용 방식을 학습자의 성장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내재적 동기를 강화하는 학습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강요된 학습은 피상적인 '잘함'만을 낳을 뿐이다. 학습자가 스스로 흥미를 느끼고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진정한 '앎'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노력이 필요하다.
- 선택의 자유와 자율성 부여: 학생들이 학습 주제, 방법, 속도 등에서 일정 부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하여 자기 주도 학습 능력을 길러준다.
- 의미 있는 맥락 제공: 학습하는 내용이 학생들의 실생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보여줌으로써 학습의 필요성과 목적의식을 심어준다.
- 성공 경험의 기회 확대: 작은 성공 경험을 통해 성취감과 효능감을 느끼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도전의식을 고취시킨다.
- 탐구와 질문의 문화 조성: 정답을 주입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시하며,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준다.
셋째, 융합적 사고와 비판적 문제 해결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
미래 사회는 단순히 많은 지식을 아는 사람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을 연결하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특정 교과에 갇힌 단편적인 지식 습득에서 벗어나,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융합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토론, 협력 학습, 프로젝트 기반 학습 등을 통해 학생들이 복잡한 실제 문제를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이는 지식의 깊이뿐만 아니라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며, 궁극적으로 지식을 활용하여 세상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앎'의 역량을 키운다.
궁극적으로 교육은 학생들을 특정 지표에 맞춰 '잘하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을 넘어, 세상을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갈 '아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전환은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 전체의 노력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하며, 이는 우리 아이들이 더욱 행복하고 의미 있는 학습 경험을 통해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